연극 ‘스미레 미용실’ 공연이 한창이던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아리랑 고개의 수미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장면에서 6열 한가운데 앉은 젊은 남성은 연신 눈가를 훔치느라 무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른 객석에서도 여럿이 눈시울을 붉혔다. 60여년 전 일본 탄광촌에서 한 재일동포 가족이 헤어지는 광경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겹쳐 보았을까.
궁금한 마음은 객석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대 한편에 누워 자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배우 전무송은 수미의 아버지 홍길을 연기한다. 자식들이 겪는 피눈물 나는 삶을 안쓰러운 낯으로 묵묵히 지켜보다 소리 없이 울고, 마지막에는 “끝내 살아야 한다”고 다독인다. 어디까지가 연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절절한 얼굴로 무대를 지키는 이 원로 배우는 어떤 마음으로 재일동포의 삶을 연기했을까.
‘달은 어느 쪽에서 뜨는가’ ‘피와 뼈’ 등에서 ‘자이니치(재일·在日·일본 거주 한인)’ 삶을 거친 화법으로 다뤄온 정의신이 쓰고 연출한 ‘스미레 미용실’은 ‘이를테면 마치 들에 피는 꽃처럼’ ‘야끼니꾸 드래곤’에 이은 ‘재일 코리안 3부작’ 마지막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예술의전당에서 2부에 해당하는 ‘야끼니꾸 드래곤’을 14년 만에 다시 선보인 데 이어 이번에는 완결편을 세종문화회관에 먼저 제안해 한국 초연으로 올렸다.
배경은 1965년 일본 규슈 탄광촌 ‘아리랑 고개’. 재일 조선인 수미는 낡은 이발소를 운영하며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용실을 열겠다는 꿈을 품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 폭발 사고가 벌어지면서 가족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뒤틀린다.
‘야끼니꾸 드래곤’과 비슷한 결을 지닌 작품이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차이도 뚜렷하다. 전작이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재일동포의 기억과 상처를 불러냈다면 ‘스미레 미용실’은 산업재해와 그 이후의 삶을 한층 전면에 내세우는 사회극이다. 고도성장기 탄광에서 터진 폭발 사고와 뒤이은 일산화탄소 중독, 회복되지 못한 피해자들의 삶과 긴 투쟁이 수미네 가족사를 타고 흐른다. 정의신 특유의 블랙코미디는 여전하지만 인물들이 짊어진 고통은 전작보다 깊고 어둡다.
차이가 가장 선명한 인물은 수미다. ‘야끼니꾸 드래곤’의 인물들이 거센 세파에 이리저리 떠밀려 사는 부평초 같았다면 수미는 제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고집한다. 의자 하나짜리 이발소를 벗어나 자기 이름을 내건 미용실 ‘스미레’를 열겠다는 꿈을 품고 역경 속에서도 활기를 잃지 않는다. 속 썩이는 남편 곁을 끝까지 지키고 산업재해 피해자와 가족을 위한 싸움에도 나선다. 기다리고 견디는 데 머물지 않고 직접 행동하는 여성이다. 수미 역을 맡은 배우 최지연은 기자간담회에서 “밖에서 볼 때는 비극으로 보이지만 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미의 세상은 희극”이라고 설명했다.
자이니치가 겪은 역경 자체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이 힘을 얻는 것은 거대한 역사보다 그 역사 속 한 가족의 생활에 돋보기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정의신은 직접 탄광을 취재하고 사고 경험자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작품에 담았다고 밝혔다. 산업은 성장하고 탄광은 문을 닫지만 그 과정에서 다친 사람과 가족의 삶은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이 무대에 남는다.
그렇다고 작품이 비극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정의신은 기자간담회에서 “비극과 희극은 평행선을 달린다고 생각한다”며 작업 중 “숨이 막힐 때면 여기서 한번 웃음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실제 무대에서도 웃음은 고통을 덜어내는 장식으로 쓰이지 않는다. 인물들은 사고를 당하고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떠나면서도 먹고 마시고 다투고 농담한다. 그렇게 살아낸다. 작품이 끝내 붙드는 것도 그 질긴 생활감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웃음은 잦아들고 가족에게 고통과 시련이 쌓인다. 배우 12명이 고르게 제 몫을 하는 가운데 극단 목화 출신 배우 홍원기의 내공 쌓인 연기가 인상적이다. 세월이 흐른 뒤 그해 여름을 들려주는 화자 큰대길로 극 전체의 호흡을 조절한다.
한없이 밝은 얼굴로 서로를 아끼며 등장하는 막내 부부 하루미와 쇼헤이를 연기한 송영주와 김문식의 연기도 돋보인다. 어떤 일이 닥칠지 먼저 걱정하게 만들던 이 부부에게 벌어지는 낙차 큰 비극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특히 탄광에 삼켜진 뒤 뒤틀린 몸과 망가진 정신으로 살아가는 남자들을 연기한 김문식과 김동원의 신체 연기도 감동적이다.
정의신은 탄광 노동자들이 이후 오사카 만국박람회 건설 현장 등으로 이동하며 일본 경제성장을 떠받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고 했다. ‘스미레 미용실’은 그런 고도성장 뒤편의 얼굴을 찾아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꿈을 꾸고 사랑하고 싸우고 끝내 살아간 자이니치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슬픔은 연민을 넘어서고, 살아낸 사람들을 향한 경의가 남는다.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에서 10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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